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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화랑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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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찰 화랑부대는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의 침투를 막기 위해 한국 경찰을 유엔군에 배속시키면서 창설된 부대이다. 1950년 8월, 미군에 배속되어 인천 상륙 작전과 장진호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길원갑 경위의 소대가 중공군과 교전하여 큰 활약을 펼쳐 미 해병대원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화랑부대는 경기도경찰국, 충청북도경찰국, 경상남도경찰국 소속 경찰관들로 구성되었으며, 1950년 8월 15일 대대급으로 창설되어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된 3개 중대와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중대, 총 4개의 중대로 구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부대의 편제와 규모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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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화랑부대
기본 정보
이름경찰 화랑부대
로마자 표기Gyeongchal Hwarang Budae
영어 명칭ROK Police Hwarang Unit
활동 기간1950년 7월 ~ 1951년 2∼9월
소속경찰
병과보병
규모대대
참전
참전한국 전쟁
인천 상륙 작전
서울 수복 전투
장진호 전투
기념일
장식
훈장
지휘관
주요 지휘관
주요 지휘관박정준 총경

2. 역사

6.25 전쟁 발발 직후, 당시 조병옥 내무부 장관은 북한군이 피난민 등으로 위장하여 아군을 교란할 것을 우려하여 한국 경찰유엔군 배속을 요청했고, 미군 사령관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1950년 8월부터 경찰 부대가 창설되어 미군에 배속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이후 인천 상륙 작전장진호 전투6.25 전쟁의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했다.[1][2][3][4]

2. 1. 초기 편성 및 활동 (1950년 8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조병옥은 북한군이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아군을 교란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에 한국 경찰을 유엔군에 배속시킬 것을 요청했고, 미군 사령관도 이를 수락했다.

그 결과, 1950년 8월 5일 중대급 규모로 추정되는 경찰 화랑부대가 미 제1임시해병여단(인천 상륙 작전 직전 미 제1해병사단 5연대로 재편됨)에 배속되었다. 이어서 1950년 8월 15일에는 경기도경찰국, 충청북도경찰국, 경상남도경찰국에서 각각 100여 명의 인원을 차출하여 대대급 경찰 화랑부대가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3개 중대로 나뉘어 미 제7보병사단의 17연대, 31연대, 32연대에 각각 배속되었다.

2. 2. 주요 전투 참가

6.25 전쟁 발발 후, 당시 조병옥 내무부 장관은 북한군이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아군을 교란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국 경찰을 유엔군에 배속시킬 것을 요청했고, 미군 사령관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1950년 8월 5일, 중대 규모로 추정되는 경찰 화랑부대가 미 제1임시해병여단 (이후 미 제1해병사단 5연대로 재편)에 배속되었다. 이어 8월 15일에는 경기도, 충청북도, 경상남도 경찰국에서 각각 100여 명을 차출하여 대대급 화랑부대가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3개 중대로 나뉘어 미 제7보병사단의 17연대, 31연대, 32연대에 각각 배속되었다.

화랑부대는 미군과 함께 여러 주요 전투에 참가했다.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된 3개 중대는 인천 상륙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이후 장진호 전투 등에서도 활약했다. 특히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길원갑 경위 소대는 장진호 전투 중 유담리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려 미군 기록에도 그 활약상이 남아있다.[1][2][3][4]

2. 2. 1.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9월 15일)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되었던 경찰 화랑부대 3개 중대는 인천 상륙 작전에 참가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상륙 당일인 1950년 9월 15일, 미 제7보병사단 32연대에 배속되어 있던 2중대 3소대가 미 제7보병사단 직할 정찰중대로 배속이 변경되어 작전에 투입되었다.

2. 2. 2. 장진호 전투 (1950년 11월 ~ 12월)

미 제1해병사단 5연대 3대대에 배속되었던 길원갑 경위가 이끄는 소대는 장진호 전투 중 유담리에서 벌어진 중공군과의 교전에서 큰 활약을 펼쳐 미 해병대원들에게 극찬을 받았다.[1][2][3]

미 해병대 퇴역 군인들의 수기에는 화랑부대의 전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당시 미 제1해병사단 5연대 3대대장이었던 로버트 태플릿 중령은 그의 저서 ‘[https://www.amazon.com/Dark-Horse-Six-Memoir-1950-1951/dp/0932572421 다크호스 식스(Dark Horse Six)]’에서 "우리 대대 지휘본부 보호 부대가 사령부 바로 위 산등성이에서 방어를 하는 동안, 화랑부대가 몰려드는 엄청난 수의 중공군을 향해 위압적인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우리의 S-2 요원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화랑부대 기관총에 죽은 적군들의 수는 200명이 넘었다"고 덧붙이며 화랑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증언했다.

  • 미 제1해병사단 출신 마틴 러스는 그의 저서 ‘[https://www.amazon.com/Breakout-Chosin-Reservoir-Campaign-Korea/dp/0140292594 브레이크 아웃(Breakout)]’에서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한국 경찰에 대해 ‘그 전초에는 미 해병에 의해 훈련된 군기 있고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한국 경찰 기관총부대가 있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장진호 전투 참전 화랑부대원은 김정득 경위, 길원갑 경위, 석호진 경위, 강정황 경위 등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이다.[4]

3. 편제

6.25 전쟁경찰 인력으로 조직된 화랑부대는 시기와 배속 부대에 따라 다르게 편성되었다. 1950년 8월 초 미국 해병대에 배속된 부대와 같은 달 중순 미국 육군 미 제7보병사단 예하에 편성된 대대급 부대가 확인된다.

3. 1. 대대급 (1950년 8월 15일 창설)

1950년 8월 15일에 창설되었으며, 지휘관은 박정준 총경이었다. 총 300여 명 규모로 3개 중대로 구성되어 미 제7보병사단 예하 연대에 각각 배속되었다.

중대소속중대장배속 부대
1중대경기도경찰국 (100여 명)이근복 경감미 제7보병사단 17연대
2중대충청북도경찰국 (100여 명)전장한 경감미 제7보병사단 32연대
3중대경상남도경찰국 (100여 명)문학동 경감미 제7보병사단 31연대


3. 1. 1. 1중대

1중대는 경기도경찰국 소속 경찰관 100여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중대장은 이근복 경감이었다. 미 제7보병사단 17연대에 배속되어 인천 상륙 작전서울 수복 전투에 참전하였고, 이후 미 제7보병사단 17연대와 함께 혜산진까지 북진하였다.

3. 1. 2. 2중대

중대장은 전장한 경감이었으며, 충청북도경찰국 소속 경찰관 1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미 제7보병사단 32연대에 배속되었다.

3. 1. 3. 3중대

경상남도경찰국 소속 경찰관 1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중대장은 문학동 경감이었으며, 미 제7보병사단 31연대에 배속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서울 수복 전투에 참가하였고, 이후 미 제7보병사단 31연대와 함께 장진호 부근 고토리까지 북진하였다.

3. 2. 미상 규모 (1950년 8월 5일 배속)

지휘관은 이해진 총경으로 추정되며, 1950년 8월 5일 미 제1임시해병여단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인천 상륙 작전 직전에 미 제1해병사단 5연대로 재편되었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서울 수복 전투에 참가하였다. 전투 이후에는 미 제1해병사단 5연대 3대대에 배속된 길원갑 경위가 지휘하는 1개 소대만이 미 해병대와 함께 북진하여 장진호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이때 길원갑 경위의 소대는 행정적으로 문학동 경감이 지휘하는 3중대로 예속 변경이 되었다.[5]

4. 추가 조사 필요 부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83년 발간한 [https://new.mnd.go.kr/user/imhc/upload/pblictn2/625combats05/index.html '한국전쟁전투사 인천상륙작전' (53페이지)]에는 '화랑부대'로 불린 경찰 전투부대가 인천 상륙 작전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화랑부대는 총원 약 400명 규모의 4개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3개 중대(약 300명)는 미 제7보병사단 예하 3개 연대에 각각 배치되었고, 나머지 1개 중대(약 100명)는 당시 미 제1임시해병여단(인천 상륙 작전 직전 미 제1해병사단 5연대로 재편) 소속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미 제7보병사단에 배치된 화랑부대와 달리, 미 제1해병사단에 소속되었던 화랑부대의 구체적인 편제나 규모에 대한 상세 기록은 현재 경찰 측에 남아있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한 추가 조사가 요구된다.

참조

[1] 뉴스 참전 미군도 극찬한 경찰 화랑부대…"장진호 전투서 영웅적 희생" https://n.news.naver[...]
[2] 뉴스 미 해병대가 극찬한 한국 경찰 '화랑부대' https://n.news.naver[...]
[3] 뉴스 장진호 전투 숨은 경찰 영웅들, 69년만에 빛보다 https://n.news.naver[...]
[4] 뉴스 ‘장진호 전투’서 美軍에 극찬받은 ‘화랑부대경찰’ https://n.news.naver[...]
[5] 서적 문학동 경감 자서전 '산 넘어 바다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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